의사는 공황 발작에 약을 처방해 줄 수 있어요. 상담사는 생각을 다시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성경은 그 둘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요.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것을 이겼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더 이상 당신의 삶에 들어올 권리가 없는지를 말해 줘요.

두려움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장 여러 번 다루신 주제예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성경에 365번 넘게 나와요. 한 해의 날수와 꼭 같은 숫자죠. 우연이 아니에요. 처방이에요. 하나님은 당신이 두려움과 함께 눈을 뜨리라는 걸 아셨고, 그래서 아침마다 약을 한 알씩 적어 두셨어요.

하지만 성경이 두려움에 내놓는 답은 의지력이 아니에요. 긍정적인 자기 암시도 아니고요. 한 인격이고, 이미 끝난 일이고, 그 앞에서는 두려움이 도무지 살아남을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계시예요.

이 글은 성경이 두려움을 어떻게 말하는지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를 따라 짚어 보고, 핵심 구절들을 살피고, 두려움을 뿌리째 걷어내는 일곱 가지 진리를 나눠요.


원어가 말하는 “두려움”

성경은 두려움을 가리켜 여러 단어를 써요. 그리고 그 차이가 중요해요.

구약에서 가장 흔히 쓰인 히브리어는 (이르아) יִרְאָה — “두려움, 경외”예요. 이 단어에는 두 얼굴이 있어요. 하나는 도망치게 만드는 공포고, 다른 하나는 엎드려 예배하게 만드는 경외예요. 어느 쪽인지는 문맥이 정해 줘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잠언 9:10, 개역한글)에서 쓰인 이르아는 떨림이 아니라 경탄과 깊은 존경이에요.

두 번째 히브리어는 (파하드) פַּחַד — “갑자기 덮치는 공포”예요. 욥이 이렇게 말할 때 쓴 단어죠.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기 3:25, 개역한글). 파하드는 새벽 세 시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들고 와 당신을 깨우는 두려움이에요.

신약에서 가장 흔한 헬라어는 (포보스) φόβος — “두려움, 경외”예요. ‘포비아(공포증)’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어요. 이르아처럼 이 말도 경외일 수 있고 날것의 공포일 수도 있어요. 오순절 이후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을 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행전 2:43, 개역한글)라고 한 것은 경외고,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소리 지른 것은 공포예요.

그런데 바울이 딱 한 곳에서만 쓴 세 번째 단어가 있어요. 디모데후서 1:7의 두려움은 포보스가 아니라 (데일리아) δειλία — “비겁함, 움츠러드는 소심함”이에요. 삶 앞에서 얼어붙어 뒷걸음질 치는 태도죠. 개역한글은 이 단어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옮겼어요. 바울은 담대함의 정반대를 가리키는 말을 골랐고, 그것을 감정이 아니라 ‘영’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말해요. 그 영은 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요.

성경은 두려움을 실재로 다뤄요. 동시에 출처가 있는 것으로 다뤄요. 어딘가에서 흘러들어 온 거예요. 그리고 복음의 좋은 소식은, 그 출처가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되었다는 거예요.


진리 1: 하늘의 첫마디는 언제나 “두려워 말라”

히브리어 (알 티라) אַל תִּירָא — “두려워 말라”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명령이에요. 그리고 천사가 사람 앞에 나타날 때 거의 언제나 첫 문장이 이 말이에요.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첫마디가 알 티라였어요.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누가복음 1:13 (개역한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도 첫마디는 알 티라였어요.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누가복음 1:30 (개역한글)

성탄절 밤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도 첫마디는 알 티라였어요.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누가복음 2:10 (개역한글)

밧모섬에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1:17 (개역한글)

이게 무슨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천사들은 병도, 쇠함도, 죽음도, 혼돈도 없는 하늘에서 왔어요. 땅에 내려와 염려에 삼켜진 사람들을 보고 건넨 단 하나의 메시지가 두려워 말라였어요.

알 티라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5장 1절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죠.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 (개역한글)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알아서 해결해 보라”고 하지 않으세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세요. 성경의 모든 “두려워 말라” 뒤에는 “나는 ~이니라”나 “내가 ~하리라”가 따라와요. 하나님은 대신 무엇을 하실지 말씀하지 않으신 채 두려워하지 말라고만 하시는 법이 없어요.


진리 2: 하나님이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7 (개역한글)

두려움에 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지만, 원어를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게 보여요.

여기 “두려워하는 마음”은 (포보스) φόβος 가 아니에요. (데일리아) δειλία — “비겁하고 움츠러드는 마음”이에요. 신약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죠. 부르심 앞에서 뒷걸음질 치게 하고, 모험을 피하게 하고, 자꾸 작게 살게 만드는 두려움이에요.

바울은 그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해요. 당신이 물려받은 유업이 아니에요. 당신의 정체도 아니고요.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데일리아는 당신 안에 들어온 이물질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뭘까요? 세 가지예요.

  • (뒤나미스) δύναμις — “능력”. 오순절에 성령이 부으신 폭발적인 힘을 가리킬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예요.
  • (아가페) ἀγάπη — “사랑”. 감상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이에요.
  • (소프로니스모스) σωφρονισμός — “근신하는 마음”. 절제되고 온전하며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정신이에요. 불안한 생각이 하나도 없는 마음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 아래 있는 마음이죠.

이건 도달해야 할 기준이 아니에요. 이미 당신 안에 예치된 선물이에요.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 함께 들어왔어요. 두려움은 당신이 텅 비었다고 말해요. 성경은 당신이 이미 가득하다고 말해요.


진리 3: 두려움의 반대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에요

많은 사람이 두려움의 반대를 용기나 믿음, 담대함이라고 생각해요. 성경은 다르게 말해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개역한글)

헬라어는 단도직입적이에요. (텔레이아 아가페) τελεία ἀγάπη — “온전하고 다 자란 사랑”이 (포보스) φόβος 를 내어쫓아요. “내어쫓나니”로 옮겨진 말은 (발로 엑소) βάλλω ἔξω — “밖으로 던져 버리다”인데,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 쓰인 바로 그 동사예요. 사랑은 두려움과 협상하지 않아요.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몰아내요. 조금씩이 아니라, 본성상 그렇게 해요.

이건 아주 중요한 지점이에요. 두려움의 반대가 믿음이라면 해법은 “더 힘껏 믿어 보라”가 되겠죠. 두려움의 반대가 용기라면 해법은 “억지로라도 움직여라”가 될 거고요. 그런데 두려움의 반대가 사랑이라면, 해법은 받는 것이에요. 사랑은 당신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에요. 이미 주신 아버지께로부터 받는 거예요.

이 구절은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도 말해요. 여기서 형벌로 옮겨진 헬라어는 (콜라시스) κόλασις — “재판으로 내려지는 처벌”이에요. 두려움은 법정처럼 움직여요.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고발하고, 정죄하고, 선고해요. 두려움이 그토록 무거운 이유가 여기 있어요. 애초에 당신이 질 것이 아닌 형벌의 무게를 지우니까요. 그 형벌은 이미 십자가에서 치러졌어요.

해법은 더 애쓰는 게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새롭게 만나는 거예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어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그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에베소서 3:18, NKJV 사역). 그분의 사랑을 깨달을수록 두려움이 설 자리는 좁아져요.


진리 4: 모든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의 두려움이에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개역한글)

이 말씀은 놀라운 주장을 해요. 평생을 묶어 두는 모든 종노릇의 뿌리를 따라가면 결국 죽음의 두려움이 나온다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건 사실 추락이 무서운 거예요. 수술이 무서운 건 살아 나오지 못할까 봐 그런 거고요. 파산이 무서운 건 결국 헐벗고 내동댕이쳐질까 봐, 거절이 무서운 건 혼자 남아 아무 보호도 없이 끊길까 봐 그런 거예요. 모든 두려움 바닥에는 끝이라는 그림자가 깔려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의 자리로 들어오신 이유가 바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해요. “없이 하시며”로 옮겨진 헬라어는 (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 — “무력하게 하다, 권세를 빼앗다, 무효로 만들다”예요. 예수님은 마귀에게 상처만 입히신 게 아니에요. 그를 파산시키셨어요. 그가 가졌던 단 하나의 무기를 벗겨 내셨어요.

마귀는 어떻게 사망의 세력을 쥐고 있었을까요? 참소로요. 히브리어 이름 (하사탄) הַשָּׂטָן 은 “고발하는 자, 검사”라는 뜻이에요. 그의 힘은 완력이 아니었어요. 법적인 근거였어요. 율법이 죄에 사형을 선고했고, 마귀는 정죄로 그 선고를 집행했어요. 당신의 잘못을 들이밀 때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휘두른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 선고가 집행됐어요. 대신 서신 분에게요. 율법의 요구는 완전히 채워졌어요. 그리고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때 참소자는 소송에서 졌어요. 이제 내밀 증거가 없어요. 사건은 종결됐고, 빚은 청산됐고, 당신은 풀려났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미래를 대하는 자세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예요. 당신은 판결을 향해 걸어가는 게 아니에요. 판결에서 걸어 나오는 중이에요. 그리고 그 판결은 “무죄”였어요.


진리 5: 애초에 혼자 지라고 주신 짐이 아니에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7-8 (개역한글)

대부분은 이 두 구절을 따로 읽어요. 그런데 베드로는 한 호흡으로 썼고, 그 연결이 모든 걸 바꿔요.

7절은 초대예요.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8절은 그게 왜 중요한지 알려 줘요. 당신이 그 짐을 계속 혼자 지고 있길 바라는 대적이 있거든요. 베드로는 “사자에게 물리지 않게 염려를 잘 간수하라”고 하지 않아요. 무게를 통째로 넘기라고 해요. 더 강하신 분이 이미 대신 지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좋은 소식은 원수를 막아 내려면 불안 없는 상태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애초에 그 무게는 당신이 질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자를 자세히 보세요. 베드로는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다닌다고 했어요. 사자가 아니라 사자 흉내를 내는 자죠. 성경에서 진짜 사자는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님이세요 (요한계시록 5:5). 포효는 물어뜯는 게 아니에요. 진리 4에서 봤듯이 십자가는 이미 원수의 권세를 벗기고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어요. 그에게 남은 건 소리뿐이에요. 패배한 적이 가장 크게 으르렁대는 건, 으르렁거림 말고는 남은 게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맡기라”는 하나님의 초대가 그렇게 자유로운 거예요. 같은 내용을 말하는 시편 55편 22절에서 “맡기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샬라크) שָׁלַךְ — “힘껏 내던지다”예요. 하나님은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인계를 원하지 않으세요. 어깨 위의 무게를 통째로 그분께 던져 버리라고 하세요. 당신의 어깨는 애초에 그걸 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분의 어깨는 그걸 감당하실 수 있으니까요.

베드로전서 5장 7절의 헬라어는 (에피르립토) ἐπιρρίπτω — “온 무게를 다른 이에게 던져 얹다”예요. 시제는 부정과거, 한 번의 결정적인 행동이에요. 그리고 베드로가 대는 이유,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는 현재형이에요. 당신의 넘김은 단번이고, 그분의 돌보심은 쉬지 않아요. 아침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을 필요도, 저녁까지 그분의 관심을 다시 얻어 낼 필요도 없어요. 넘기는 순간 그건 그분의 것이 되고, 계속 그분의 것으로 남아요.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친 곳은 르비딤이었어요. “쉬는 곳들”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죠 (출애굽기 17:8). 아말렉이라는 이름은 (아말) עָמָל — “고통스러운 수고”라는 어근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날 이스라엘이 이긴 방법은 더 악착같이 싸운 게 아니라, 모세의 손을 들고 곁에서 받쳐 준 것이었어요 (출애굽기 17:12). 승리는 안간힘이 아니라 의지함의 자세에서 나왔어요. 은혜 아래서 당신의 유일한 싸움은 안식에 머무는 것이에요.

그러니 안식은 원수를 막으려고 당신이 붙들고 서 있어야 할 벽이 아니에요. 안식은 이미 당신을 붙들고 계신 분께 온 체중을 기대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 인생의 마지막 방어선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세요. 가장 꽉 움켜쥐고 싶은 자리가 바로 그분이 손을 펴라고 초대하시는 자리예요. 놓는 게 위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을 붙드시는 그분의 손이 애초에 당신 손아귀에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안식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싸우시는 자리이고, 그분은 한 번도 지신 적이 없어요.


진리 6: 당신은 종이 아니라 아들이에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개역한글)

바울은 두 영을 나란히 놓아요. 종의 영과 아들 됨의 영이에요.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을 통해 그분과 관계했어요. 거리를 두었고, 그분의 거룩을 무서워했고, 자기 죄가 영원히 제거되었다는 확신이 없어서 늘 밑바닥에 불안을 깔고 살았어요.

종의 영은 특정한 종류의 두려움을 만들어요. 이르아의 경외가 아니라, 벌을 예상하는 사람의 움츠린 공포예요. 종은 오늘이 주인의 인내가 바닥나는 날인지 아닌지를 끝내 알 수 없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당신이 그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요.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요. 그 증거가 단어 하나에 담겨 있어요. 아바. 이건 격식 있는 신학 용어가 아니에요. (아바) אַבָּא 는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가장 친밀하고 편안한 말이에요.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말 중 하나죠.

성령님은 종의 영과는 함께 증언하실 수 없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당신의 속마음이 벌을 두려워하는 종의 자세라면, 진리의 영께서 확증하실 것이 없어요. 전제가 틀렸으니까요. 당신은 종이 아니에요. 아들이에요. 인정을 얻어 내려고 섬기는 게 아니라, 이미 인정받았기에 섬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수록, 그것도 이론이 아니라 가까움이 느껴지는 자리에서 부를수록, 두려움의 영은 힘을 잃어요. 두려움은 거리를 먹고 자라요. 아들 됨은 그 거리를 아예 없애 버려요.


진리 7: 평안은 기분이 아니라 한 인격이에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개역한글)

예수님은 그저 평안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어요. 당신이 가지신 것을 그대로 넘겨주신 거예요. 뱃전으로 파도가 넘어오는 풍랑 속에서 주무실 수 있었던, 바로 그 평안이요.

히브리어 (샬롬) שָׁלוֹם 은 “온전함, 완전함”이에요. 마음이 잔잔한 상태보다 훨씬 넓은 말이죠. 빠진 것도 없고 깨진 것도 없는 상태예요.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께 (사르 샬롬) שַׂר שָׁלוֹם —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요. 잔잔한 기분의 왕이 아니라,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온전함의 대장이세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에요. 바깥 형편에 매이지 않아요. 어려움 안에서 작동해요.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아요. 폭풍이 여전히 요란한 중에도 일해요.

바울은 이 평안을 한 인격과 동일시했어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에베소서 2:14 (개역한글)

평안은 기술이 아니에요. 호흡법도, 긍정 선언도 아니에요. 평안은 한 인격이고, 그 이름은 예수님이세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실 때, 그분은 자기 자신을 주시는 거예요. 당신이 평안을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평안이신 분을 받는 거예요.

세상이 주는 평안은 형편이 좋아야 유지돼요. 여행은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주고, 술 한 잔은 날 선 마음을 조금 눅여 줘요. 둘 다 잠깐이에요. 조건에 매여 있으니까요. 그리스도의 평안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변하지 않으세요.


두려움에 관한 핵심 성경 구절 10개

1. 이사야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개역한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이 줄줄이 이어져요. 모든 “말라” 뒤에 “내가 하리라”가 따라와요. 어떤 위기에서도 가장 먼저 들어야 할 음성은 그분의 음성이에요.

2.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개역한글)

다윗은 골짜기를 피하지 않아요. 통과해요. 그리고 가장 어두운 대목에서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삼인칭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는 이인칭으로 바꿔요.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멀어지시는 게 아니라 더 가까이 오세요.

3.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개역한글)

두 번의 되물음이에요. 여호와가 당신의 빛이시면 더 두려워할 대상이 없어요. 여호와가 당신의 힘이시면 더 무서워할 대상이 없고요.

4. 시편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개역한글)

다윗은 두려움이 없는 척하지 않아요. 인정하고, 방향을 돌려요. 신뢰는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에요.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거예요.

5.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 1:9 (개역한글)

하나님은 담대함을 명령하세요. 여호수아가 원래 용감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 이미 결과를 확보해 두셨기 때문이에요.

6. 신명기 31:6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신명기 31:6 (개역한글)

담대함의 근거는 당신의 능력이 아니에요. 떠나기를 거절하시는 그분의 마음이에요.

7. 시편 46:1-2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시편 46:1-2 (개역한글)

그분은 멀리서 도우시는 분이 아니에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세요. 환난이 지나간 뒤가 아니라, 환난 한가운데서요.

8. 시편 91:5-6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시편 91:5-6 (개역한글)

네 가지 위협, 네 번의 면제 선언이에요. 그 조건은 1절에 있어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예요.

9. 로마서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1 (개역한글)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어떤 대적도 성공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당신과 함께한 편이 맞선 편보다 많아요.

10.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요한일서 4:18 (개역한글)

마지막 한마디예요. 온전한 사랑, 곧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다 자란 사랑은 두려움을 관리하지 않아요. 내쫓아요.


복음이 두려움에 주는 답

복음이 두려움에 주는 답은 “더 용감해지려고 애써 보라”가 아니에요. “이미 주어진 것을 받으라”예요.

능력이 주어졌어요. 사랑이 주어졌어요. 근신하는 마음이 주어졌어요. 평안이 주어졌어요. 죽음의 두려움에서 놓인 자유가 주어졌어요.

두려움은 두려움을 노려본다고 물러가지 않아요. 말씀을 먹을 때 물러가요. 히브리어로 “싸우다”는 (라함) לָחַם, “떡”은 (레헴) לֶחֶם — 같은 자음으로 되어 있어요. 위기 한복판에 그리스도가 계세요. 싸움 한복판에서는 먹으세요.

두려움은 최악이 아직 앞에 있다고 말해요. 복음은 최악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해요. 이천 년 전 십자가에서요. 그리고 그 일을 견디신 분은 살아 계시고, 앉으셨고, 평온하시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세요.

당신은 안전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중이 아니에요. 안전이 이미 당신에게로 내려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