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아래인가, 은혜 아래인가

율법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요. 은혜는 무엇이 이미 이루어졌는지 말해요. 한쪽은 당신에게 요구하고, 다른 한쪽은 당신에게 공급해요. 그리고 성경은 오늘 우리가 둘 중 어느 쪽 아래 살고 있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해요.
로마서 6:14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지나가듯 들어 본 구절이에요. 그런데 그 말씀이 실제로 무엇을 선언하는지 멈춰 서서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아요. 바울은 “율법과 은혜의 균형을 잡아 보라”고 말하지 않아요. “거룩은 율법으로, 구원은 은혜로 해결하라”고도 말하지 않아요.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말해요.
이 구절은 두 체계를 부서별로 나누지 않아요. 시대로 나눠요. 당신은 이쪽 아래 있든지 저쪽 아래 있든지 둘 중 하나예요. 그리고 바울에 따르면, 어느 쪽 아래 있느냐가 죄가 당신을 주관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해요.
이 글은 그 선언을 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따라, 신약의 주요 본문들을 따라, 그리고 모든 신자가 마주하는 실제적인 질문을 따라 짚어 볼 거예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면,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죄에서 지켜 주나요?
원어에서 “율법”과 “은혜”는 무슨 뜻인가요
신약에서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노모스) νόμος — “규범, 원리, 명령들로 이루어진 체계”예요. 헬라어 구약인 칠십인역에서 노모스는 히브리어 (토라) תּוֹרָה — “가르침, 지침”을 옮긴 말이에요. 토라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에요. 바울이 분명히 인정해요.
율법은 거룩해요. 문제는 한 번도 율법이었던 적이 없어요. 문제는 율법이 말을 건넨 그 육신이었어요.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졌다고 말해요(로마서 8:3). 율법 자체가 약한 게 아니라, 타락한 인간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에 약했다는 뜻이에요.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리스) χάρις — “값없이 주어진 호의, 거저 받는 선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에요. 카리스는 “기쁨”을 뜻하는 (카라) χαρά와 한 뿌리예요. 은혜는 단지 신학의 한 항목이 아니에요. 받는 사람 안에 기쁨을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공급이에요.
요한은 두 체계 사이에 선을 분명하게 그어요.
동사가 달라요. 율법은 “주신 것”이에요. 은혜와 진리는 한 인격으로 “온 것”이에요. 율법은 종을 통해 전달된 명령의 묶음이고, 은혜는 육신을 입고 직접 찾아오신 한 분이세요.
율법의 목적: 사다리가 아니라 거울
많은 그리스도인이 십계명을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여겨요. 규칙을 지키고, 한 칸 더 올라가고, 인정을 얻는 식이죠. 그런데 성경은 율법에 그런 역할을 맡긴 적이 없어요. 바울은 단도직입적이에요.
율법은 당신을 의롭게 만들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주어진 거예요. 사다리가 아니라 거울로 기능해요. 거울은 얼굴이 더럽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지만, 그 얼굴을 씻겨 주지는 못해요. 그것이 율법의 한계예요. 율법은 진단은 하지만 치료는 못 해요.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한시적인 보호자 역할을 했다고 말해요.
여기서 “몽학선생”으로 옮겨진 헬라어는 (파이다고고스) παιδαγωγός — 고대 사회에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곁에서 감독하던 집안의 종이에요. 파이다고고스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스승도 아니에요. 미성년자에게 붙여 둔 보호자였어요. 바울의 요점은 오해할 여지가 없어요. 율법은 영적인 어린아이를 위한 것이었고, 은혜는 장성한 자의 자리예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율법 아래 두셨어요. 때가 차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주셨어요(갈라디아서 4:4-5). 규칙과 규정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아들의 자리는 장성한 자를 위한 것이에요.
두 개의 산, 두 개의 언약
성경은 두 언약의 본부로 두 개의 산을 보여 줘요. 시내산은 율법의 옛 언약을, 시온산은 은혜의 새 언약을 대표해요. 히브리서 12장은 그 대비를 생생하게 그려요.
그것이 시내산이에요. 불, 흑암, 두려움. 모세조차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어요(히브리서 12:21). 율법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백성은 하나님께 말씀을 그쳐 달라고 간청했어요.
이제 시온산을 보세요.
시내산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요. 시온산은 “너희가 이미 이르렀다”고 말해요. 옛 언약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밀어냈고, 새 언약은 사람을 가까이 끌어당겨요.
역사의 기록도 그 대비를 확인해 줘요. 시내산에서, 첫 오순절에 율법이 주어졌고 삼천 명이 죽었어요(출애굽기 32:28).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 성령이 주어졌고 삼천 명이 구원을 받았어요(사도행전 2:41). 의문은 죽이고 영은 살려요. 바울은 이것을 조금도 흐리지 않고 말해요.
그리고 각 직분에 이름을 붙여요.
바울은 십계명을, 특히 “돌에 써서 새긴” 그 말씀을 가리켜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라 부르고 “정죄의 직분”이라 불러요. 율법의 다른 어떤 부분도 돌판에 새겨지지 않았어요. 오직 십계명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에 새겨졌지요. 바울은 그 직분이 영광스러웠지만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해요. 믿음으로 얻는 의의 직분이 그보다 훨씬 더 영광이 넘쳐요.
‘율법 씨’와의 결혼: 로마서 7장의 비유
로마서 7장에는 신약 전체에서 가장 실제적인 비유 하나가 들어 있어요. 바울은 신자와 율법의 관계를 결혼에 빗대요.
‘율법 씨’라는 남편과 결혼한 한 여자를 떠올려 보세요. 율법 씨는 악한 사람이 아니에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에요. 바울이 직접 그렇게 말해요(로마서 7:12). 그런데 율법 씨는 요구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명령은 내리지만 손가락 하나 거들지 않아요. “이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그럴 힘은 주지 않아요. 실패는 낱낱이 짚어 내면서 위로는 건네지 않아요.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남편이지만, 함께 살기에는 불가능한 남편이에요.
여자는 그냥 떠날 수가 없어요.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매여 있어요. 이혼이라는 선택지는 없어요. 유일한 출구는 죽음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어요. 당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으실 때 당신도 죽었어요. 바울은 이 비유를 이렇게 적용해요.
이 새로운 결혼의 목적은 정죄냐 칭의냐를 가리는 데 있지 않아요. 열매를 맺는 것에 있어요. 이 본문 전체가 답하는 질문은 하나예요. 참된 거룩은 어떻게 나오는가? 율법 씨와의 결합에서는 나오지 않아요. 오직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만 나와요.
율법 씨는 열매를 요구했지만 한 번도 맺어 주지 못했어요. 당신의 새 남편,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으로 당신 안에서 열매를 맺으세요. 행위와 열매의 차이는 애씀과 생명의 차이예요. 행위는 용쓰는 데서 나오고, 열매는 포도나무의 수액에서 나와요.
왜 죄의 권능이 율법인가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말이 이거예요. 바울은 그냥 대놓고 선언해요.
죄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요? 은혜가 아니에요. 율법이에요. 죄를 억제하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체계가 실제로는 죄를 강하게 만들어요.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 작동 원리를 설명해요.
여기서 “기회”로 옮겨진 헬라어는 (아포르메) ἀφορμή — “작전 기지”를 뜻하는 군사 용어예요. 헬라어 학자 W.E. Vine은 이 단어를 “출발점”이라 정의하면서 “전쟁에서의 작전 기지”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고 설명해요. 바울은 율법이 죄에게 영혼을 공격할 작전 기지를 내주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전쟁에서 적의 작전 기지를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동원해 그곳을 칩니다. 당신의 영혼을 향한 적의 작전 기지는 은혜가 아니에요. 율법이에요. 원수의 전술은 당신을 율법 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죄가 계명을 발사대로 삼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보세요. 애굽에서 시내산까지, 순전한 은혜 아래서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홍해에서 원망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마라에서 물을 두고 불평했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먹을 것을 두고 투덜거렸더니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어요. 불평이 새로 터질 때마다 은혜가 새롭게 드러났어요. 이삼백만 명이 걷던 그 여정 내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어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시내산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말했지요.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애굽기 19:8). 아직 십계명을 듣지도 않은 상태였어요.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시든 자기들 능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넘겨짚은 거예요. 다음 장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어요. 그다음 장에는 금송아지가 등장해요. 애굽에서 들고 나온 바로 그 금, 은혜 아래 있던 하루하루 동안 단 한 번도 그들을 유혹하지 않았던 그 금이, 그들이 스스로를 율법 아래 두는 순간 우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삼천 명이 죽었어요.
금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육신이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었어요. 바뀐 것은 체계였어요. 은혜 아래서는 죄가 주관하지 못했어요. 율법 아래서 죄는 작전 기지를 얻었어요.
유리 온실 이야기
사내아이 몇 명이 길을 걸어가요. 유리로 뒤덮인 온실 하나를 지나가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유혹도 없고 충동도 없어요. 그냥 지나쳐 가요.
같은 길 끝에 또 다른 온실이 있어요. 거기엔 팻말이 붙어 있어요. “돌을 던지지 마시오. 깨지기 쉬움.” 주변엔 아무도 없어요.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다봐요. 그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쳐다봐요. 갑자기 무리의 모든 아이 안에, 삼십 초 전에는 없던 충동이 솟아올라요.
온실이 문제가 아니에요. 팻말에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팻말은 정확하고 좋아요. 유리는 정말로 깨지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육신 안의 무언가가 금지 앞에서 반응해요. 율법은 거룩해요. 계명은 의로워요. 그런데 육신은 자기를 발동시켜 줄 법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바울이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쓴 거예요(고린도전서 15:56).
정욕을 품지 않으려 애쓸수록 더 정욕이 일어요. 탐내지 않으려 애쓸수록 더 탐하게 돼요. 바울이 바로 이 경험을 묘사해요.
답은 모든 도덕 기준을 걷어치우는 데 있지 않아요. 답은 당신이 살아가는 체계를 바꾸는 데 있어요. 율법 아래서 당신은 죄짓지 않으려 애쓰고, 그러다 육신을 깨워요. 은혜 아래서 당신은 그리스도께 시선을 두고, 성령께서 율법이 결코 맺지 못한 열매를 맺어 주세요.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말의 진짜 뜻
사람들은 대개 “은혜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큰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요. 이 표현이 도덕적 실패를 가리키는 관용어처럼 쓰이게 된 거죠.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의 상황을 가리키는 데 이 말을 써요.
죄를 지어서 은혜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율법으로 되돌아가서 은혜에서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진다”는 말 자체가 은혜가 더 높은 자리라는 걸 전제해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을 율법 지킴으로 확보하려고 돌아가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굴러떨어지는 일이에요.
J.B. Phillips 역은 이렇게 옮겼어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자동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스스로를 끊어 내고, 그분의 은혜가 미치는 범위 밖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아무 효력 없는 분”이 되었다고 할 때, 그 헬라어는 (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 — “무력하게 하다, 효력 없게 만들다”예요. 개역한글은 이 대목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로 옮겼어요. 움직이신 분은 그분이 아니에요. 움직인 쪽은 당신이에요. 은혜의 땅에서 발을 떼어 자기 노력의 땅으로 옮겨 선 거예요. 그리고 그 땅에서는 오직 당신의 힘만 남는데, 그건 힘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이스라엘은 금송아지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시내산에서 은혜에서 떨어졌어요. 금송아지는 증상이었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어요. 신자가 죄에 빠지기 훨씬 전에, 먼저 은혜에서 떨어져요. 율법 의식으로, 자기 노력으로, 하나님이 이미 대체하신 요구의 체계로 돌아가면서요.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세요
바울은 신약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장 가운데 하나를 써요.
“마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텔로스) τέλος예요. 이 단어는 두 가지 뜻을 품어요. “종결”과 “목표”예요.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이시자, 율법이 내내 가리키던 목표세요. 율법은 한 번도 목적지였던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였어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빚이 청산되었어요.
“의문에 쓴 증서”, 곧 율법이 모든 사람에게 들이대던 빚 문서가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유예된 게 아니에요. 잠시 멈춘 것도 아니에요. 끝났어요. 예수님이 친히 외치셨어요. (테텔레스타이) τετέλεσται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텔로스와 같은 뿌리예요.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에 이르렀어요. 하나님께는 당신을 향해 남은 청구서가 없어요.
히브리서는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확인해 줘요.
옛 언약은 연명 치료 중인 게 아니에요. 낡아 폐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친히 그렇게 선언하셨어요. 새 언약은 더 나은 중보자로 세워졌고, 더 나은 약속 위에 서 있고, 더 나은 피로 인쳐졌어요.
율법이 못한 일을 은혜는 어떻게 이루나요
은혜가 율법을 치운다면, 거룩도 함께 치우는 걸까요?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미리 내다본 질문이 바로 이거예요.
바울의 대답은 “율법을 지켜라”가 아니에요. 그의 대답은 “너희는 죽었다”예요. 죽은 사람은 죄의 명령에 반응하지 않아요. 참된 신자는 죄에 머물 수 없어요. 규칙 때문이 아니라 새 본성 때문이에요.
은혜는 율법보다 적은 거룩을 만들어 내지 않아요. 더 많은 거룩을 만들어 내요.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해요. 한 남자가 그 계명을 겉으로는 다 지키면서도 아내에게 쓴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문자는 지키고 정신은 어긴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로 마음이 가득 차면, 그분이 배우자를 향한 사랑을 부어 주세요. 간음의 부재가 아니라 애정의 현존이에요. 율법은 금지에 머물지만, 은혜는 율법이 요구하던 바로 그것을 공급해요.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 작동 원리를 밝혀요.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요. 우리 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헬라어 본문은 수동태를 써요. 이루는 주체가 우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규칙을 의식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걸어갈 때, 성령께서 우리 삶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이루세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되, 율법과 은혜를 다룬 네 장의 가르침 뒤에 놓아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것들은 은혜 아래 살아온 삶의 추수예요. 율법 아래서는 “육체의 일”이 나오고, 은혜 아래서는 “성령의 열매”가 나와요. 행위는 애씀에서 나오고, 열매는 생명에서 나와요.
자주 묻는 질문
그러면 십계명이 나쁘다는 말인가요?
아니에요.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해요(로마서 7:12). 거울은 좋은 도구예요. 문제는 거울로 얼굴을 씻으려 할 때 생겨요. 율법은 진단해요. 치료하라고 주어진 적이 없어요. 치료는 그리스도세요.
그리스도인은 마음껏 죄지어도 되나요?
바울이 직접 답해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로마서 6:2). 질문 자체가 거듭남을 오해하고 있다는 걸 보여 줘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본성을 받은 사람은 죄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아요. 은혜는 죄지을 면허를 주지 않아요. 은혜는 죄 위에서 살아갈 능력을 줘요.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으셨다고 하신 건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열쇠는 “완전케 하려”예요.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폐하지 않으셨어요. 율법이 요구한 모든 것을 삶에서, 그리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셨어요. 율법은 파괴된 게 아니라 완성된 거예요. 그분이 완성하셨기에 당신이 다시 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의 의는 한 인격이세요.
내가 “은혜에서 떨어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의 신뢰는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내 성적표, 내 도덕적 이력, 계명을 지키는 내 능력에 기대고 있다면, 이미 은혜의 땅에서 발을 뗀 거예요. 그 표시는 대놓고 짓는 죄가 아니에요. 영성으로 포장한 자기 노력이에요. 서 있는 땅이 살아 내는 삶을 결정해요.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요?
넘어진 뒤에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약함을 의지력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져가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자기 정죄라는 빵을 씹는 대신 십자가의 다 이루신 일을 먹고 사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율법과 은혜의 실제적인 차이는 요구와 공급의 차이예요. 율법은 거룩을 요구하고, 은혜는 거룩을 공급해요.
율법은 길을 예비하려고 앞서 보내진 종이었어요. 은혜는 머물려고 오신 아들이세요. 아들이 집에 계신데 다시 종에게로 돌아갈 이유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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