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은 이미 판결을 내렸어요. 판사는 자리에서 내려갔고, 판결봉도 울렸어요. 그런데 피고인이 다시 일어나 이렇게 물어요. “그런데… 정말 확실한가요?”

자기 구원을 의심하는 신자의 모습이 꼭 이래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진실한 신자들을 정신과 진료실까지 데려갔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담대함을 빼앗았고, 기쁜 소식을 깨알 같은 단서 조항이 붙은 조건부 제안으로 바꿔 놓았어요.

하지만 성경은 이 질문을 열어 둔 채 넘어가지 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울의 편지로, 성령의 증거로 정면으로 답해요. 원어를 따라가며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 보면, 그 답은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분명해요.

이 글에서는 핵심 본문들을 살펴보고, 원어를 짚어 보고, 흔히 걸림돌이 되는 구절들을 다루고, 마지막에는 성경이 도달하는 그 자리에 함께 설 거예요. 영원하고, 이미 완성되었고, 되돌릴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에요.


‘구원’은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소조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에 답하려면, 먼저 구원이 무엇인지부터 정해야 해요.

신약 전체에서 “구원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소조) σῴζω — “건져 내다, 낫게 하다, 놓아주다, 온전케 하다, 상하지 않게 지키다”예요. 단순히 “지옥을 면하는 것”만 뜻하지 않아요. 훨씬 넓고 깊은 말이에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마가복음 5:34 (개역한글)

여기서 “구원하였으니”가 바로 소조예요. 병든 몸이 낫는 자리에도, 죄에서 건짐받는 자리에도 똑같은 단어가 쓰였어요. 야이로가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할 때도 소조, 바울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쓸 때도 소조예요.

구원은 입장권이 아니에요. 영과 혼과 몸까지 통째로 건져 내는 구출이에요.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바울이 쓴 시제가 중요해요. 헬라어로 “구원을 얻었나니”는 완료 수동태 분사예요. 완료형은 이미 끝난 일인데 그 결과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고, 수동태는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해 준 일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이 당신을 구원한 게 아니에요. 이미 주어진 것을 받았을 뿐이에요.

구원이 내 성과에 달려 있다면 그건 소조가 아니라 월급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선물이라고 불러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개역한글)

삯은 일해서 버는 거예요. 선물은 그냥 받는 거고요. 일을 그만두면 삯은 끊기지만, 이미 내 계좌에 들어온 선물을 “안 받은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어요. 더구나 그 선물을 넣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요.


영원한 구원을 말하는 열 구절

1. 요한복음 10:28~29 —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0:28~29 (개역한글)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에는 헬라어의 이중 부정이 들어 있어요. (우 메) οὐ μή — “결코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아니다”. 헬라어로 낼 수 있는 가장 강한 부정이에요. 예수님은 “아마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보세요, 우리는 두 손에 붙들려 있어요. 예수님의 손, 그리고 아버지의 손이에요. 당신의 안전은 당신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붙드심이에요.

2. 로마서 8:38~39 — 끊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개역한글)

바울은 존재하는 모든 범주를 다 늘어놓아요. 시간, 공간, 영적 권세, 삶의 형편까지요. 그리고 “확신하노니”는 (페페이스마이) πέπεισμαι — “설득되었고 지금도 그 확신 안에 있다”예요. 완료 수동형이에요.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 확신이었어요.

3. 에베소서 1:13~14 —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어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3~14 (개역한글)

여기 나오는 두 헬라어 단어는 따로 떼어 자세히 볼 만해요. 다음다음 대목의 중심이에요.

4. 에베소서 2:8~9 — 은혜로, 믿음으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개역한글)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면, 행위의 실패로 잃어버릴 수도 없어요. 논리에 빈틈이 없어요. 착한 행실로 얻은 게 아니니 나쁜 행실로 잃을 수도 없는 거예요. 구원의 근거는 은혜예요. 값없이, 자격 없이, 조건 없이 주어진 호의예요.

5. 히브리서 10:14 — 영원히 온전케 하셨어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4 (개역한글)

한 제물, 온전함,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테텔레이오켄) τετελείωκεν — “이미 온전하게 이루어 놓으셨고 그 결과가 지금도 그대로다”예요. 예수님의 한 번의 제사가 모든 믿는 이에게 영원한 온전함을 이루었어요. 우리는 여전히 날마다 “거룩하게 되어 가는” 중이지만, 하나님 앞에 선 신분은 이미 결판이 났어요. 빈 무덤이 그 영수증이에요.

6. 빌립보서 1:6 — 시작하신 분이 이루세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개역한글)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마치세요. “확신하노라”는 (페포이도스) πεποιθώς — 여기도 완료형이에요. 바울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도착해 있었어요.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미완성으로 두지 않으세요.

7. 고린도후서 1:21~22 — 견고케 하시고, 인치시고, 보증을 주셨어요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1~22 (개역한글)

하나님이 하신 세 가지예요. 견고케 하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넣어 두셨어요. 세 동사의 주어가 전부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마지막 실수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당신을 보세요.

8. 로마서 8:1 — 정죄함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개역한글)

정죄함이 없어요. “덜하다”가 아니에요. “컨디션 나쁜 날에만 있다”도 아니에요. 아예 없어요. “정죄함”은 (카타크리마) κατάκριμα — “형벌을 선고하는 법정의 판결”이에요. 재판은 끝났고, 판결은 그대로 서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남은 정죄는 없어요.

9. 요한1서 5:13 — 알게 하려고 쓴 편지예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1서 5:13 (개역한글)

요한은 우리가 바라거나 짐작하거나 궁금해하라고 쓴 게 아니에요. 알라고 썼어요. 헬라어 (에이데테) εἰδῆτε —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알다”예요. 하나님은 자녀가 완전한 확신을 품기를 원하세요. 자기 신분을 놓고 평생 불안에 떨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 앞에 선 당신의 자리는 감정을 따라 오르내리지 않아요.

10. 요한복음 5:24 —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개역한글)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 ἀμὴν ἀμήν — 진리를 두 번 못 박는 선언이에요. 예수님은 믿는 자가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어요. 지금 손에 들고 있다는 뜻이에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의 심판은 (크리시스) κρίσις —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그 단어와 같아요. 이전은 이미 끝났어요.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어요. 과거형이에요. 끝난 일이에요.


성령의 인 치심: 깨뜨릴 수 없는 보증

에베소서 1장 13~14절의 두 헬라어 단어는 따로 다룰 만해요. 이 질문에 상거래처럼 정확하게 답을 내리거든요.

스프라기조 — 인(印)

“인치심”은 (스프라기조) σφραγίζω — “인을 찍다, 봉인하다”예요. 1세기 로마 세계에서 인은 세 가지 일을 했어요.

  1. 소유권 — 인은 그 물건이 누구의 것인지 표시했어요. 지중해를 건너는 화물에는 주인의 인이 찍혀 있었고, 누가 그 화물에 손을 대면 그건 주인에게 저지른 범죄였어요.

  2. 보호 — 인은 내용물을 지켰어요. 예수님의 무덤도 로마의 인으로 봉해졌어요(마태복음 27:66). 그 인을 깨는 건 로마의 권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었어요.

  3. 진위 — 인은 그것이 위조가 아님을 보증했어요. 공증된 서명 같은 역할이었어요.

하나님이 성령으로 당신을 인치셨을 때, 그분은 당신을 자기 소유로 표시하시고, 자기 권세 아래 보호하시고, 자기 자녀임을 확인해 주신 거예요. 인 쳐진 신자의 인을 떼려면 하나님보다 큰 권세가 있어야 해요. 그런 권세는 존재하지 않아요.

아라본 — 계약금

“보증”은 (아라본) ἀρραβών — “계약금, 착수금, 나머지 전액을 보증하는 첫 지불”이에요. 시장에서 쓰이던 상거래 용어예요.

현대 그리스어에서도 아라본은 약혼반지를 뜻해요. 결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보증하는 징표예요.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약혼반지를 끼워 주신 거예요. 전체 기업은 아직 남아 있어요. 몸의 구속,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지만 계약금은 이미 당신 계좌에 들어와 있어요.

계약금은 파는 쪽이 거래를 보증하는 방식이에요. 계약금을 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거래를 끝까지 이행할 책임을 지신 분도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부도내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20 (개역한글)

당신은 인 쳐졌고, 보증되어 있어요. 그 피는 어떤 저주도 남겨 두지 않았어요.


히브리서 10장의 세 증인

사람들은 히브리서 10장 26절, “짐짓 죄를 범한즉”을 문맥에서 뚝 떼어 인용해요. 하지만 이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성경 전체에서 영원한 구원을 가장 강하게 말하는 대목 중 하나예요.

이 장은 세 증인을 세워요. 아버지의 뜻, 아들의 일, 성령의 증거예요.

첫째, 아버지 하나님의 뜻(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개역한글)

하나님의 뜻은 율법의 옛 언약을 걷어 내고 은혜의 새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어요. 그 뜻을 따라 믿는 자들은 거룩함을 얻었어요. 해마다가 아니에요. 단번에, 영구히예요.

둘째, 아들 예수님의 일(12~14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2, 14 (개역한글)

예수님은 앉으셨어요. 구약의 성막에는 의자가 없었어요. 제사장은 서 있었어요. 그의 일이 끝나는 날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앉으셨어요. 그분의 일은 끝났기 때문이에요. 한 번의 제사, 영원히요. 당신이 넘어질 때마다 그분이 다시 일어서시는 게 아니에요. 그분은 앉아 계시고, 당신도 그분과 함께 앉아 있어요.

셋째, 성령의 증거(15~17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10:15~17 (개역한글)

성령이 증언하세요.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요. 이 구절에도 헬라어 이중 부정 (우 메) οὐ μή가 쓰였어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쓰신 그 구조예요.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잊으세요. 부활은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하나님의 공개 선언이에요.

그리고 19절에서 이 장은 결론을 내려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세 증인이 낳은 결과는 두려움이 아니에요. 담력이에요. 활짝 열린 길이에요. 믿음의 온전한 확신이에요.


히브리서 6장 4~6절은요?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주장에 가장 자주 동원되는 본문이에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6:4~6 (개역한글)

세 가지만 보면 흔한 오독이 무너져요.

첫째, 수신자를 보세요. 히브리서는 히브리인, 곧 유대인들에게 쓴 편지예요. 그중 많은 이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머리로는 동의했지만, 구원을 위해 그분께 자기를 온전히 맡기지는 않았어요. 여전히 성전 제사에 참석하고 있었어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지, 영생을 손에 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히브리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해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 유대인 독자예요.

둘째, “비췸을 얻고”라는 말을 보세요. 빛을 받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같지 않아요. 성경 공부에 꼬박꼬박 앉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쌓고, 말씀의 선함을 맛보고도 구원받지 못한 채 돌아설 수 있어요. 바리새인들도 빛을 받았어요. 가룟 유다도 빛을 받았어요. 하지만 비췸은 새 생명 앞에서 멈춰 서요. 이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은 받았지만, 진리 되신 그분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어요.

셋째, “할 수 없나니”라는 말을 보세요. 이 본문이 구원을 잃은 거듭난 신자를 가리킨다면, 본문은 그들을 다시 회개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셈이에요. 그런데 이 구절로 신자들을 겁주는 사람들이 설교가 끝나면 어김없이 회개의 초청을 해요. 회개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 부류가 아니에요. 이 본문은 이론적인 불가능을 말하지, 죄와 씨름하는 신자의 일상을 말하지 않아요.

이 경고는 1세기에 믿음의 문턱까지 와서 그 혜택을 맛보고도, 다 알면서 성전 제도로 되돌아간 유대인들을 향한 것이었어요. 화를 참지 못한 그리스도인, 중독과 싸우는 그리스도인, 한 계절 의심을 통과하는 그리스도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참된 신자는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요.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가 그것을 막아요.


마태복음 7장 21~23절은요?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개역한글)

예수님의 말씀을 천천히 읽어 보세요. “내가 한때 너희를 알았는데 이제는 모른다”가 아니에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예요. ‘도무지’라는 말이 결정적이에요. 이 사람들은 단 한 번도 그분과 관계 안에 있었던 적이 없어요. 종교 활동은 있었어요.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도 행했어요. 그런데 관계는 없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증거로 내민 것을 보세요. 전부 자기가 한 일이에요.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지 않았나이까,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나이까, 우리가 권능을 행하지 않았나이까.” 변론이 하나같이 자기를 가리켜요. 그중 누구도 “그러나 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들의 확신은 그분의 인격이 아니라 자기 실적에 놓여 있었어요. 의는 선물이지, 노력으로 따내는 훈장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은 구주를 영접한 적 없이 종교만 열심히 한 이들이에요. 그분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셨어요. 애초에 구원받은 적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이것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이 있어요.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하면, 사람들이 마음 놓고 죄를 짓지 않겠어요?” 성경이 보여 주는 것도, 현실이 보여 주는 것도 정반대예요.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한 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기가 치료한 그리스도인 환자들 대부분은 하나님이 자기를 온전히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자들이었다고요. 상당수는 히브리서 6장이나 10장을 문맥 없이 읽고, 자기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결론 내린 사람들이었어요. 자기가 영원히 안전하다고 믿어서 진료실에 앉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용서받은 걸 아는 사람은 죄를 향해 달려가지 않아요. 자기를 용서하신 분께로 달려가요.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그것을 직접 보여 주셨어요. 먼저 정죄하지 않으셨고, 그다음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어요. 순서가 중요해요. 안전이 명령보다 먼저였어요. 은혜가 가르침보다 앞섰어요. 많이 용서받은 걸 아는 사람이 많이 사랑해요.

바울도 이 반문을 정면으로 받았어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1~2 (개역한글)

은혜를 만난 사람은 더 죄짓고 싶어지지 않아요. 은혜는 거룩함을 만들어 내요. 바깥에서 누르는 압력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요. 은혜는 사람을 덜 거룩하게 하는 게 아니라 더 거룩하게 해요. 안전한 줄 알게 되면, 두려워서 잘 보이려던 삶이 멈추고 감사해서 사는 삶이 시작돼요.

요한1서 3장 9절이 이것을 확인해 줘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1서 3:9 (개역한글)

여기서 “죄를 짓다”는 현재형이에요. 죄를 삶의 방식으로 계속 붙들고 산다는 뜻이에요. 거듭난 신자도 비틀거릴 수 있고, 넘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죄 속에 아예 눌러앉지는 않아요.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발을 헛디딜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자녀 자리를 잃지는 않아요. 당신은 죄책감에 대하여 죽었지, 능력에 대하여 죽은 게 아니에요.


복음의 마지막 한마디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더 깊은 질문을 드러내요. 내 구원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이에요.

내게 있다면, 네, 잃을 수 있어요.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까요. 하나님께 있다면, 아니요, 잃을 수 없어요. 그분은 신실하시니까요.

그리고 성경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말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개역한글)

하나님이 당신을 인치셨어요.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넣어 두셨어요. 하나님이 한 제물로 당신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어요. 하나님이 피조물 중 어느 것도 당신을 그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어요.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지금도 제사장처럼 서 계셔야 해요. 그런데 그분은 앉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