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만 채울 수 있는 빈 자리

새벽 한 시, 한 청년이 침대에 누워 얼굴에서 한 뼘 거리에 휴대폰을 들고 있어요. 해변에 있는 어떤 여자, 친구가 새로 뽑은 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에 사는 낯선 사람의 집이 손끝을 따라 지나가요. 폰을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고, 또 넘겨요. 내일은 오늘 밤보다 기분이 더 나쁠 거예요.
그는 남의 삶을 빌려 살아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의 가장 좋은 순간에 자기를 견줘요. 결과는 뻔해요. 나만 빠진 것 같고, 나만 뒤처진 것 같고, 나는 부족한 것 같아요.
휴대폰을 탓하면 정작 중요한 걸 놓쳐요. 휴대폰은 이미 그 안에 있던 것을 드러냈을 뿐이에요. 속에 난 빈 자리, 그리고 그 자리를 결코 채우지 못하는 화면이요.
아담은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를 품고 지어졌어요
창세기는 하나님이 첫 사람을 지으신 장면을 이렇게 기록해요.
아담은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사람의 원형이에요. 하나님은 그에게 몸과 혼과 생명을 주셨어요. 그러나 아담 안에 자기 아들을 넣어 두지는 않으셨어요. 그 자리는 비워 두셨어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실지는 아담이 선택해야 했어요.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빈 자리를 품고 태어나요.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요.
죽을 몸 안에 영원을 담는 자리가 있어요. 시간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해요. 그래서 승진의 기쁨은 일주일이면 시들고, 새 차의 설렘은 한 달이면 식어요. 그 자리는 한 분을 위해 만들어졌으니까요.
빈 집은 비어 있는 채로 남지 않아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거예요. "좋아요, 그럼 그냥 비워 두겠어요. 아무도 들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선택지는 없어요.
예수님은 한 사람에게서 나간 더러운 귀신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 귀신은 떠돌다가 쉴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어요.
그 집은 청소도 되었고 수리도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비어 있었어요. 바로 그 비어 있음이 초청장이었어요.
그리스도가 그 빈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다른 존재가 채워요. 그 자리를 노리는 악한 존재가 있고, 그가 자리를 차지하면 집을 꾸미는 데 그치지 않아요. 운전대를 잡아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혐오하는 습관을 끊지 못해요. 지난 정월에 다시는 안 하겠다고 맹세한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바울은 그 경험을 안에서 이렇게 그려요.
예수님은 병명을 이렇게 진단하세요.
이미 다른 이가 핸들을 쥐고 있는 거예요.
더 많이 가져도 왜 늘 부족할까요
같은 빈 자리가, 새벽 한 시에 침대가 아니라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도 설명해 줘요. 첫 십억을 벌고 나니 두 번째 십억이 필요했어요. 천억을 넘겼는데 이제 조 단위를 이야기해요. 언제쯤 충분해지느냐고 물으면, 그는 숫자를 대지 못해요.
그는 자기가 돈을 찾는다고 생각해요. 실은 자기 안의 빈 자리를 찾고 있어요. 돈은 그 자리에 맞는 모양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떡을 얻으려고 따라온 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덜 주리리라"가 아니에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예요. 그것은 완전히 채워진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그 자리는 어떻게 채워질까요
채우시는 분은 한 인격이고, 그분은 자기 영을 함께 데려오세요.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 빈 자리는 성령을 받아요. 바울은 믿는 사람이 그분 안에서 충만해졌다고 말해요.
여기서 "충만하여졌으니"로 옮겨진 말은 (페플레로메노이) πεπληρωμένοι — "채워진, 충만하게 된" 이에요. (플레로오) πληρόω — "채우다, 충만하게 하다"의 완료 수동 분사예요. 채워지는 일은 이미 일어났고, 그 결과가 지금도 그대로 서 있다는 뜻이에요. 개역한글이 "충만하여졌으니"라고 완료의 어감을 살려 놓은 걸 성경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휴대폰을 든 청년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피드가 아니에요. 그 경영자에게 필요한 건 0 하나가 아니에요. 두 사람 모두, 아담이 품도록 지어졌던 바로 그것이 필요해요.
당신 안에는 그리스도만 들어와 사실 수 있는 방이 있어요. 비워 두면 다른 무엇이 이사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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