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보신 장면 가운데 하나는, 군병들이 자기 옷을 놓고 제비를 뽑는 모습이었어요.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19:24 (개역한글)

만물의 주인이신 분이 거기 달려 계셨고, 사람들은 그분에게 남은 마지막 한 조각을 놓고 주사위를 굴렸어요. 이 장면이 바로 신약에서 가장 자주 오해받는 구절의 배경이에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8:9 (개역한글)

바울은 이 문장을 돈을 다루는 두 장 한복판에 놓았어요.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준비해요. 마게도냐 교회들의 넉넉한 마음을 칭찬하고, 디도를 보내 그 연보를 마무리하게 하지요. 문맥 전체가 재정이고 나눔이에요. 돈을 말하는 장에서 9절만 쏙 뽑아 들고, 이건 순전히 영적인 이야기라고 선언할 수는 없어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영적으로 가난해지셨다고 가르쳐요. 하지만 그분은 단 한 번도 영적으로 가난하신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 보세요. 영적 가난이 우리를 부요하게 만든 것이라면, 영적 가난은 좋은 것이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 돼요.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이 지신 가난은 실제였어요.

"가난하게 되심"으로 옮겨진 말은 (엡토케우센) ἐπτώχευσεν — "가난해지다, 빈털터리가 되다"예요. 이 말은 (프토코스) πτωχός — "구걸하는 자, 온전히 남에게 기댈 수밖에 없게 된 사람"에서 왔어요. 검소한 살림 정도가 아니에요. 가진 것을 남김없이 다 빼앗긴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분이 무엇을 내려놓으셨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분은 가장 온전한 의미에서 부요한 분이셨어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 (개역한글)

별들을 제자리에 두신 분이에요. 모든 들판, 모든 광산, 모든 바다가 그분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아무것도 가지신 게 없었어요. 군병들이 그 옷을 가져갔고, 그분은 벌거벗겨진 채, 저주 아래, 빚진 자의 자리에 달려 계셨어요.

이것이 속죄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대신하심의 방식이에요. 우리의 것을 그분이 지시고, 그분의 것을 우리가 받게 하신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갈라디아서 3:13-14 (개역한글)

그분이 저주를 받으셔서 당신이 복을 받게 되었어요. 그분이 버림받으셔서 당신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어요. 당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기에, 그분이 지지도 않은 빚을 대신 갚으셨어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8:9은 그 목록에 한 가지 교환을 더 얹어요. 그분이 가난해지셔서 당신이 공급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욕심을 부려도 좋다는 초대가 아니에요. 바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금을 모으려고 이 말을 썼어요. 공급받은 성도는 나눌 수 있는 성도예요. 십자가의 교환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아요. 오히려 거기서 당신을 자유롭게 해요. 당신의 공급처가 더 이상 의심거리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질문은 예수님이 당신의 공급을 사셨느냐가 아니에요. 그 구절이 사셨다고 말하고, 그 이유까지 말해 주거든요. "너희를 위하여"라고요. 질문은 당신이 그분 사역의 그 부분을 받아들이겠느냐예요. 누구도 억지로 떠안기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죄를 짊어진 바로 그 십자가 안에 함께 놓여 있어요.

당신의 공급은 멀리서 던져진 약속이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