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말 한 단어로는 도무지 옮겨지지 않는 말이 하나 있어요. 번역자들은 ‘자비’라고도 했고 ‘인자’라고도 했고, ‘긍휼’, ‘인애’, ‘성실’, ‘선대’라고도 옮겼어요. 어느 것이나 한 조각씩은 담아내요. 그런데 전부를 담아내는 말은 없어요.

그 단어가 (헤세드) חֶסֶד예요.

구약에 251번 나와요. 시편을 온통 적시고 있어요. 룻의 충절을 설명하는 말이고, 무너진 성 한복판에서 예레미야가 소망을 적을 수 있었던 이유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다윗이 복을 베풀 사람을 찾으며 입에 올린 말이기도 해요. 그 사람이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다른 사람과 맺은 언약 때문에요.

구약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헤세드를 알아야 해요. 그리고 신약의 은혜를 알고 싶다면, 그 은혜의 뿌리가 처음부터 헤세드였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 글은 이 단어를 히브리어 어원에서부터 구약의 주요 본문들까지 따라가면서, 왜 헤세드가 새 언약이 말하는 은혜를 가장 잘 미리 보여 주는 말인지 짚어 볼 거예요.


헤세드의 히브리어 뜻

히브리어 (헤세드) חֶסֶד — 스트롱 번호 H2617 — 은 (하사드) חָסַד라는 어근에서 나왔어요. “목을 굽히다”, 곧 상대를 향해 몸을 낮추어 친절을 베푼다는 뜻이에요. 이 한 단어 안에 사랑, 신의, 자비, 성실, 언약의 책임이 한꺼번에 들어 있어요. 우리말에서는 서로 다른 칸에 나누어 넣는 것들이죠.

그렇다고 헤세드가 차가운 의무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오락가락하는 감정도 아니에요. 자기가 한 약속을 하나도 남김없이 깨뜨린 사람들 곁에 끝까지 남기로 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결심이에요.

번역자들이 왜 애를 먹었는지는 우리말 성경만 펼쳐 봐도 알 수 있어요. 똑같은 한 단어를 문맥마다 이렇게 다르게 옮겼거든요.

  • 개역한글: “인자”(출애굽기 34:6), “자비”(예레미야애가 3:22), “인애”(호세아 6:6), “은총”(사무엘하 7:15), “선대”(룻기 1:8)
  • 개역개정: “인자”, “은총”, “사랑”
  • 새번역: “한결같은 사랑”, “인자하심”

번역마다 다른 면을 하나씩 잡아요. 다이아몬드는 하나인데, 번역자마다 손에 들고 비춰 보는 각도가 다른 거예요.

한 단어로 안 되는 이유는 헤세드가 두 가지 차원을 동시에 품고 있기 때문이에요. 첫째, 언약적이에요. 약속에 묶인 사랑이에요. 둘째, 후해요. 언약이 요구하는 선을 훌쩍 넘어가요. 헤세드를 베푸는 사람은 계약 조건을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아요.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 스스로 그 조건을 넘어가요.

그래서 헤세드를 가장 실감 나게 정의하면 이래요. 언약의 테두리를 넘쳐흐르는 언약의 사랑.


헤세드는 다른 ‘사랑’ 단어들과 어떻게 다른가

성경에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 여럿 있어요. 헤세드는 그중 어느 것과도 겹치는 데가 있지만, 어느 것으로도 바꿔 쓸 수는 없어요.

헤세드와 아하바

히브리어에서 사랑을 뜻하는 가장 흔한 말은 (아하바) אַהֲבָה — “사랑”이에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에 쓰인 말이 이것이에요. 아하바는 애정과 갈망과 헌신을 폭넓게 가리켜요. 헤세드는 그보다 좁아요. 약속으로 뒷받침된 언약 관계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에요.

헤세드와 라하밈

(라하밈) רַחֲמִים — “긍휼, 애틋한 자비”는 “태”를 뜻하는 (레헴) רֶחֶם에서 나왔어요. 어미가 제 자식을 볼 때 속에서부터 저려 오는 그 마음이에요. 헤세드는 그 애틋함을 품고 있으면서, 거기에 오랜 세월을 견디는 신의와 성실을 더해요.

헤세드와 아가페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넓게 가리키는 말은 (아가페) ἀγάπη — “값없이 베푸는 사랑”이에요. 아가페는 상대의 자격과 상관없이 그 사람을 향해 선을 베푸는 사랑이에요. 헤세드와 아가페는 ‘조건 없음’에서 겹쳐요. 다만 헤세드에는 언약이라는 뼈대가 하나 더 있어요. 아가페는 값없이 주어져요. 헤세드는 값없이 주어지면서 동시에 깨어질 수 없는 약속이 받치고 있어요.

헤세드와 필레오

(필레오) φιλέω — “벗을 향한 사랑”은 가까운 사이의 따뜻한 정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헤세드에도 그 온기가 있지만, 필레오에는 없는 언약의 무게가 함께 실려 있어요.

정리하면 이래요. 헤세드는 순수한 애정(아하바)도 아니고, 애틋한 긍휼(라하밈)만도 아니고, 일반적인 선의(아가페)만도 아니고, 개인적인 정(필레오)만도 아니에요. 그 전부가 하나로 묶인 사랑이에요. 언약에 매여 있고,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이에요.


헤세드를 보여 주는 구약의 일곱 본문

1. 룻기 1:8 — 사람과 사람 사이의 헤세드

나오미는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었어요. 그리고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축복해요.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룻기 1:8 (개역한글)

여기 “선대”로 옮긴 말이 헤세드예요.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가 언약적 신실함을 보였다는 것을 알아봤어요. 하나님께가 아니라 남편에게,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말이에요. 헤세드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리키는 드문 자리 중 하나예요. 헤세드가 하나님만의 속성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사람의 관계 안에 심어 두신 신실함의 기준이기도 해요.

룻의 대답 —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기 1:16) — 그 자체가 헤세드예요. 뒤에 보아스도 룻의 헤세드를 알아봐요.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기 3:10 (개역한글)

여기 “인애”가 다시 헤세드예요. 룻의 이야기는 언약의 사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 주는 그림이에요. 헤세드는 계산하지 않아요. 그냥 붙들어요.

2. 예레미야애가 3:22–23 — 폐허에서도 살아남는 헤세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뒤에 애가를 썼어요. 성전은 무너졌고, 성은 잿더미였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어요. 그 폐허 한가운데서 그는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하나를 적었어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야애가 3:22–23 (개역한글)

여기 “자비”는 헤세드의 복수형인 (하스데) חַסְדֵי예요. 예레미야는 편안한 자리에서 이 말을 쓰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참사 한복판에서 썼어요. 그런데 그의 결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가 아니었어요.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헤세드라는 것이었어요.

이 단어의 성질이 그래요. 상황에 좌우되지 않아요. 잘한 행실을 요구하지도 않아요. 당신을 끝장냈어야 할 계절을 당신이 통과해 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에요.

3. 호세아 6:6 — 제사보다 헤세드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의 가치 서열을 통째로 뒤집는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6 (개역한글)

여기 “인애”가 헤세드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나는 너희 의식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언약의 관계를 원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이 구절을 두 번 인용하셨어요(마태복음 9:13, 마태복음 12:7). 두 번 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죄하던 사람들을 감싸시면서요.

호세아서 전체가 헤세드를 몸으로 보여 줘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을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한 방식을 그대로 그려 보이신 거예요. 그리고 다시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그게 헤세드예요. 상대가 등을 돌려 떠나 버린 뒤에도 그만두기를 거부하는 신실함이에요.

4. 출애굽기 34:6–7 — 하나님이 하신 자기소개

모세가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 앞을 지나가시며 친히 자기 이름을 선포하셨어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소개예요.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출애굽기 34:6–7 (개역한글)

여기에는 서로 다른 히브리어 두 단어가 함께 나와요. “자비롭고”는 (라훔) רַחוּם — “긍휼이 많은”이에요. 그리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의 “인자”,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의 “인자”가 둘 다 헤세드예요. 하나님은 헤세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헤세드가 많다고, 그것을 천대까지 베푼다고 하셨어요.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자주 되풀이되는 신앙고백이 됐어요. 느헤미야 9:17, 시편 86:15, 시편 103:8, 시편 145:8, 요엘 2:13, 요나 4:2에서 인용되거나 메아리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붙들어야 할 때마다 이 말로 돌아갔어요. 그 한복판에 헤세드가 서 있어요.

5. 사무엘하 7:15 — 떠나지 않는 헤세드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왕위가 영원하리라고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헤세드에 관해 한 가지를 못 박아 두셨어요.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사무엘하 7:15 (개역한글)

“내 은총”이 (하스디) חַסְדִּי — “나의 헤세드”예요.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셨어요. 네 후손이 실패하더라도 내 언약적 신실함은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고요. 받는 사람의 행실에 달린 약속이 아니에요. 그 약속을 하신 분의 성품에 달린 약속이에요.

6. 미가 7:18 — 헤세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는 질문으로 책을 맺어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7:18 (개역한글)

여기 “인애”가 헤세드예요. 그리고 열쇠가 되는 말은 “기뻐하시므로”예요. 하나님은 마지못해 헤세드를 베푸시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서 용서하시는 것도 아니에요. 그 일을 기뻐하세요. 헤세드는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의무가 아니에요. 가장 즐기시는 일이에요.

7. 시편 23:6 — 당신을 뒤쫓는 헤세드

다윗은 가장 널리 알려진 시편을 이렇게 맺어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6 (개역한글)

여기 “인자하심”이 헤세드예요. 그리고 “따르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르데푸니) יִרְדְּפוּנִי — (라다프) רָדַף에서 온 말이에요. “뒤쫓다, 추격하다”라는 뜻이에요. 도망치는 적군을 군대가 추격할 때 쓰는 바로 그 동사예요. 하나님의 헤세드는 당신이 와서 받아 가기를 기다리지 않아요. 당신을 쫓아와요. 끝까지 따라붙어요.


다윗과 므비보셋: 살아 움직이는 헤세드

구약에서 헤세드를 다윗과 므비보셋의 이야기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은 없어요.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 죽고, 다윗은 왕이 됐어요. 세월이 흘렀어요. 어느 날 다윗은 손목의 흉터를 내려다봤어요. 요나단과 언약을 자를 때 생긴 자국이었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어요.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사무엘하 9:1 (개역한글)

여기 “은총”이 헤세드예요. 그런데 히브리어는 우리말이 주는 느낌보다 훨씬 강해요. 다윗은 동사를 겹쳐 써서 “내가 반드시 그에게 헤세드를 베풀리라”라고 말했어요. 약속을 힘껏 못 박는 어법이에요. 지나가는 말이 아니었어요.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었어요.

사울의 옛 종 시바가 다윗에게 알려요. 요나단에게 살아남은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므비보셋이라고요. 그는 두 발을 다 절었어요. 사울이 죽은 뒤 혼란 속에서 유모가 안고 달아나다 떨어뜨린 아이였어요(사무엘하 4:4). 그는 로드발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어요. “목초지가 없다”, 또는 “말씀이 없다”는 뜻이에요. 왕자가 황무지로 밀려난 셈이죠.

다윗은 사람을 보냈어요. 므비보셋이 궁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어요.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했어요.

므비보셋은 도착하자마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어요. 심판을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가 들어 온 소문마다 다윗은 자기 원수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다윗의 첫마디는 이랬어요.

“무서워 말라 내가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정녕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사무엘하 9:7 (개역한글)

“은총”이 헤세드예요. “반드시 … 베풀리라”가 바로 그 겹쳐 쓴 히브리어 동사예요. 다윗은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라고 말했어요. 헤세드의 근거는 므비보셋이 한 일이 아니었어요. 다윗이 요나단과 맺은 언약이었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하나님은 당신의 성과를 보고 은총을 베푸시지 않아요. 예수님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은총을 베푸세요. 당신이 므비보셋이에요. 걸음은 절뚝이고, 메마른 곳에 갇혀 있고, 심판을 각오한 사람이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세요.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게 헤세드를 베풀리라. 예수를 인하여.”

므비보셋의 대답은 마음을 아프게 해요.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사무엘하 9:8 (개역한글)

“죽은 개”는 쓰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 관용 표현이었어요. 자기를 낮출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이었죠. 그리고 헤세드가 찾아가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예요. 헤세드는 당신이 쓸 만한 사람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아요. 로드발까지 찾아와 왕의 상 앞으로 데려가요.

이야기는 성령께서 일부러 남겨 두신 한 문장으로 끝나요.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저가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두 발이 다 절뚝이더라” 사무엘하 9:13 (개역한글)

그는 여전히 절뚝였어요. 걸음은 끝내 고쳐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왕의 상에서 항상 먹었어요. 상 아래로, 그 두 발은 가려져 있었어요. 그게 은혜의 그림이에요. 당신의 온전치 못한 걸음은 왕의 상에서 당신을 밀어내지 못해요. 당신은 먹으러 나아오고, 당신의 다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그 상이 덮어 줘요.


시편의 헤세드: 한 가지 진리, 127번

구약에 251번 나오는 헤세드 가운데 127번이 시편에 있어요. 절반이 넘어요. 이 숫자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있어요. 예배하고 기도하라고 주신 책이 이 한 단어로 흠뻑 젖어 있다는 거예요.

시편 136편: 대할렐

시편 136편은 성경에서 헤세드가 가장 빽빽하게 모여 있는 곳이에요. 유대 전통은 이 시편을 “대할렐”, 곧 위대한 찬양시라고 불러요. 스물여섯 절인데, 한 절도 빠짐없이 같은 후렴으로 끝나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개역한글)

“그 인자하심”이 (하스도) חַסְדּוֹ — “그의 헤세드”예요. 시인은 스물여섯 번을 되풀이해 선언해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는 유효 기간이 없다고요. 이 시편은 창조(4-9절), 출애굽(10-16절), 가나안 정복(17-22절), 그리고 백성을 건지신 일(23-25절)을 차례로 훑어요. 그리고 어느 대목에서나 똑같이 말해요. 그의 헤세드가 영원하다고요.

이 반복은 의도된 거예요. 한 가지 진리를 어느 누구도 놓칠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만들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이유가 헤세드라는 진리요. 창조가 헤세드였어요. 건지심이 헤세드였어요. 채우심이 헤세드였어요. 승리가 헤세드였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영원해요.

시편 103:8–12 — 헤세드는 어디까지 닿는가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헤세드를 가장 개인적인 말로 그려 냈어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편 103:8–12 (개역한글)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와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가 둘 다 헤세드예요.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두 가지 거리로 재요.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 그리고 동과 서 사이의 너비요. 둘 다 잴 수 없는 거리예요. 헤세드는 계산할 수도, 바닥낼 수도 없어요. 어떤 자로도 재지 못할 만큼 멀리, 당신의 실패는 이미 옮겨졌어요.

시편 89:1–2 — 무너지지 않게 지어진 헤세드

에스라인 에단은 헤세드를 영원함과 잇는 선언으로 시편 89편을 열어요.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시편 89:1–2 (개역한글)

“인자하심”이 헤세드예요. 히브리어는 헤세드가 “세워진다”고 말해요. (이바네) יִבָּנֶה — 무너지지 않을 건물을 지을 때 쓰는 바로 그 동사예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기분이 아니에요. 구조물이에요.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세워졌고,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을 거예요.


칠십인역은 헤세드를 어떻게 옮겼나

기원전 3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옮겼어요. 이 번역이 칠십인역(LXX)이고, 초대 교회의 성경이 됐어요. 그들이 헤세드를 다룬 방식은 중요한 것 하나를 보여 줘요.

칠십인역은 헤세드를 대개 (엘레오스) ἔλεος — “긍휼”로 옮겼어요. 칠십인역 예레미야애가 3:22에 쓰인 말이고, 예수님이 호세아 6:6을 인용하실 때 나오는 말이에요. “내가 긍휼(엘레오스)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태복음 9:13).

그런데 엘레오스는 헤세드를 다 담지 못해요. 엘레오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에요. 헤세드가 품고 있는 언약의 신의까지는 실어 나르지 못해요. 번역자들은 자비는 지켰지만 언약은 놓쳤어요.

후에 라틴어 불가타는 misericordia — “비참한 자를 향한 마음”을 썼어요. 여기서도 자비는 살아남았어요. 언약은 살아남지 못했어요. 헤세드의 온전한 뜻이 여러 세기 동안 반쯤 가려져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예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신약을 읽는 히브리어권 신자들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을 바로 알아봐요. 신약이 “은혜” — (카리스) χάρις라고 말하는 자리마다, 그들은 그것을 헤세드로 읽어요. 현대 히브리어 성경의 요한복음 1:17은 이렇게 읽혀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헤세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7 (NKJV 사역)

이 연결은 우연이 아니에요. 은혜는 십자가 이후의 헤세드가 띤 얼굴이에요.


헤세드와 새 언약: 자비에서 은혜로

요한복음 1:17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보여 주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예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17 (개역한글)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헤세드 베 에메트”로 읽혀요. (헤세드) חֶסֶד와 (에메트) אֱמֶת — “언약의 사랑과 진리”예요. 똑같은 짝이 출애굽기 34:6에도 나와요. 하나님이 자신을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으로 소개하신 그 자리요. 시내 산에서 자기 성품에 대해 알리신 것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남김없이 건네주셨어요.

옛 언약 아래서 헤세드는 약속되었고, 부분적으로 드러났어요. 하나님은 룻에게, 다윗에게, 므비보셋에게,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그것을 보여 주셨어요. 하지만 그것은 늘 앞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영구하고, 인격적이고, 완전한 언약을 향해서요.

새 언약 아래서 헤세드는 은혜가 됐어요. 값없이 주어지는 그 언약의 사랑이, 이제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보증된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히 못 박아요.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 (개역한글)

열쇠는 “하물며”예요. 온전치 못한 제사와 이스라엘이 몇 번이고 깨뜨린 언약, 그 옛 체계 아래서도 하나님이 헤세드를 보이셨다면, 친아들의 피로 인 친 언약 아래서는 얼마나 더하시겠어요?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내가 반드시 네게 헤세드를 베풀리라”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 겹쳐 쓴 동사는, 훗날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모든 믿는 이에게 하실 말씀을 미리 비춰 줘요.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어쩌면이 아니에요. 네가 자격을 갖추면도 아니에요. 반드시예요. 예수를 인하여요.

옛 언약 아래서 헤세드는 “천대까지 베푸시는”(출애굽기 34:7) 것이었어요. 새 언약 아래서 은혜는 이미 도착했어요.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이미 주어진 것을 받기만 하면 돼요.


헤세드가 하나님을 보는 눈을 바꾸는 이유

많은 사람이 구약을 읽으며 화난 하나님을 봐요. 재앙과 심판과 까다로운 율법을 보죠. 그러고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라고 여겨요.

그런데 헤세드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줘요.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 251번 나오는 이 단어는 심판의 단어가 아니에요. 신의와 애틋함과 끈질긴 신실함의 단어예요. 하나님이 자기를 소개하실 때 쓰신 말이고, 시인들이 그 무엇보다 자주 돌아간 말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규정하는 말이에요. 그들이 순종할 때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말이에요.

헤세드는 신약이 만들어 낸 개념이 아니에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한 줄기 실이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뒤쫓으신 그 하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28)고 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세요.

다윗이 “내가 헤세드를 베풀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인심을 쓰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언약을 이행하고 있었어요. 복 줄 사람을 찾아 나서게 만든 사랑에 떠밀린 거예요. 그 사람이 그럴 만해서가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 맺은 약속 때문에요.

하나님도 오늘 같은 질문을 하세요. 흠 없는 사람을 찾고 계신 게 아니에요. 아담의 집에 남은 사람이면 누구든 찾고 계세요. 절뚝이고, 숨어 있고, 심판을 각오한 사람을요. 그 상으로 데려오시려고요.

상에 앉아 먹기 전에 당신의 걸음부터 고쳐 놓을 필요는 없어요. 그 상은 처음부터 다리 저는 사람을 위한 자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