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엉뚱한 시제로 읽으면, 엉뚱한 서랍에 넣어 두게 돼요.

많은 신자가 로마서 8:11을 그렇게 다뤄요. 한번 읽고, 잠깐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러고는 그 약속을 통째로 미래로 밀어 두죠. "그건 휴거 때 될 일이지" 하면서요. 그렇게 이 구절은 "언젠가"라고 적힌 서랍에 들어가고, 오늘 화요일 아침의 내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져요.

그런데 구절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11 (개역한글)

시점을 못 박아 두는 단어가 하나 있어요. 죽을 몸이에요.

여기서 "죽을"로 옮겨진 말은 (thnēta) θνητά — "죽음에 매인, 죽을 수밖에 없는"이에요. 죽을 몸이란 여전히 병들 수 있고, 여전히 지치고, 여전히 죽는 몸이에요. 그건 부활의 몸에 대한 설명이 아니에요. 휴거의 때에는 죽음에 매인 성질 자체가 완전히 벗겨지니까요.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린도전서 15:53 (개역한글)

그러니 두 약속은 같은 약속일 수가 없어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썩지 않을 새 몸을 받아요. 그런데 로마서 8:11에서 성령님은 지금 이 몸에 생명을 주세요. 오늘 아침에 눈을 뜬 그 몸, 진단서를 안고 있는 그 몸, 세월을 고스란히 느끼는 그 몸에요. "살리시리라"로 옮겨진 말은 (zōopoiēsei) ζῳοποιήσει — "살릴 것이다, 생명을 줄 것이다"예요. 바울은 그 약속을 오늘 당신이 살고 있는 바로 그 몸에 정확히 겨누고 있어요.

구절에 이것뿐이었어도 충분했을 거예요. 그런데 더 있어요.

다시 읽으면서 삼위 하나님을 세어 보세요. "영" — 성령님이에요. "살리신 이" — 아버지세요. "예수" — 아들이세요. 그리고 구절은 같은 순서를 한 번 더 되풀이해요. "살리신 이" —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 아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 — 성령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구절 안에 두 번 나와요.

성경은 말을 낭비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한 문장 안에서 삼위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실 때는, 지면 위에서 목소리를 높이시는 거예요. 우리 주의를 끌고 싶으신 거죠. 아버지께서 당신 몸의 생명에 관여하세요. 아들도 관여하세요. 성령님도 관여하세요. 이건 하나님의 계획서에 딸린 사소한 조항이 아니에요. 세 분이 두 번 서명하신 개인적인 프로젝트예요.

그리고 그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 보세요. 어떤 무대에서가 아니에요. 어떤 특별한 장소에서도 아니에요.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예요. 봉인된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그 성령님이 모든 믿는 자 안에 자리를 잡고 사세요. 그 무덤을 비워 낸 바로 그 능력이 당신 몸에서 멀리 있지 않아요. 그 안에 살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의 건강을 "언젠가"라는 서랍에 넘겨 주지 마세요. 그래요, 영광스러운 몸이 오고 있고, 우리는 그날을 기쁘게 기다려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까지 죽어 가는 몸을 참고 견디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당신이 가진 이 죽을 몸에 생명을, 실제로 지금 여기에서 몸으로 누리는 생명을 약속하셨어요. 그것도 당신의 온전한 이름을 두 번 걸고서요.

이 구절을 바른 시제로 읽으세요. 그리고 바른 시제로 기대하세요.

하나님은 로마서 8:11을 앞으로 받을 몸을 위해 쓰지 않으셨어요. 지금 가진 몸을 위해 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