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공항 게이트 앞에 서서 비행기에 오르지 못해요. 비행이 무섭다고 말해요. 사실은 아니에요. 그를 떨게 하는 건 비행기가 아니에요. 추락이에요. 그 두려움을 뿌리까지 따라 내려가 보면 하나가 나와요. 그는 죽는 게 두려운 거예요.

사람의 두려움 대부분이 같은 뿌리 위에 앉아 있어요. 높은 곳이 무서운 건 떨어지면 죽기 때문이에요. 병이 무서운 건 병이 무덤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졌을 때 사람들을 사로잡은 공포도 열이나 기침 때문이 아니었어요. 죽음 때문이었어요. 마귀는 이 사실을 알아요. 그리고 자기 전략 전체를 바로 그 위에 세웠어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4-15 (개역한글)

마귀의 무기는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에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그리고 그 결과는 이따금 찾아오는 불편함 정도가 아니에요. 성경은 사람들이 "일생에 매여 종노릇" 했다고 말해요. 여기서 개역한글이 '종노릇'으로 옮긴 말은 (둘레이아) δουλεία — "노예 살이"예요. 단 하나의 두려움이 붙잡아 두는 평생의 노예 살이예요.

마귀는 이런 식으로 일해요. 당신을 손대지 않고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어요. 당신이 인생의 끝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되니까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끼려고 자기 삶을 자꾸 줄여요. 가지 않아요. 주지 않아요. 걸지 않아요. 말하지 않아요. 죽음의 두려움은 죽음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요. 미리 삶을 훔쳐 가요.

이제 예수님이 이 일에 어떻게 하셨는지 보세요. 본문은 자녀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분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고 해요. 왜요? 하나님이신 그분은 죽으실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어요.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개역한글이 "없이 하시며"로 옮긴 말은 (카타르게오) καταργέω — "무력하게 하다, 효력을 없애다"예요. 예수님은 마귀를 존재에서 지워 버리신 게 아니에요. 무장을 해제시키신 거예요. 마귀는 여전히 있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는 그의 단 하나뿐인 무기가 더 이상 통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일부러 죽음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고, 반대편으로 걸어 나오셨어요. 이제 죽음은 그것을 이긴 분에게 이미 시험당한 것이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본문은 이 모든 사명의 목표를 이렇게 밝혀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십자가는 구출 작전이었어요. 예수님은 단지 당신의 행실을 조금 나아지게 하려고 죽으신 게 아니에요. 감옥 문을 열려고 죽으셨어요.

그러니 이 본문이 던지는 정직한 질문을 해 볼게요. 예수님이 믿는 자들을 죽음의 두려움에서 풀어 주셨다면, 왜 그토록 많은 믿는 이들이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풀려남은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문이 열린 뒤에도 감방 안에 그대로 앉아 있는 죄수가 있어요. 문은 열렸어요. 사슬은 끊어졌어요. 그런데 아직 묶여 있다고 믿는 사람은 묶인 사람처럼 살아요.

다윗은 십자가가 그 사실을 설명해 주기 훨씬 전에 이미 풀려난 자리를 알고 있었어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4 (개역한글)

다윗은 골짜기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했어요. 히브리서 2장이 당신 앞에 내미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골짜기 없는 삶이 아니라, 목줄 없는 삶이에요. 죽음의 두려움이 고개를 들 때, 십자가의 사실로 대답하세요.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죽음을 마주하셨고, 그 죽음을 무기 삼던 자의 힘을 이미 꺾어 놓으셨어요.

마귀는 당신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으니 당신의 자유를 노려요. 예수님은 그 무기를 그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죽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