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내려가는 겸손의 사다리

사도 바울은 흔히 사도 중의 사도로 꼽혀요.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왔어요. 사역이 넓어질수록 자신감도 함께 올라갔으리라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가 쓴 편지들을 쓰인 순서대로 따라가 보면, 전혀 다른 곡선이 보여요.
사역 초기,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다른 지도자들과 견주어요:
몇 해 뒤,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견주는 대상이 넓어져요:
이제 그는 자신을 지도자들 가운데 꼴찌가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 가운데 꼴찌로 봐요.
그리고 생의 끝자락,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는 믿는 사람들과 견주는 일조차 그만둬요:
헬라어에서 여기 쓰인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에이미) εἰμί — “나는 ~이다”, 현재 시제예요. “내가 괴수였다”가 아니라 지금도 괴수라는 말이에요. 개역한글도 그 현재형을 그대로 살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옮겼어요.
바울이 점점 더 나빠진 게 아니에요. 점점 더 또렷이 보게 된 거예요.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기 방 안에 떠다니던 먼지가 낱낱이 드러났을 뿐이에요.
그러나 그는 먼지 앞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절망으로 끝내지 않았어요. 이 깨달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더 크게 비출 뿐이었어요.
빚이 클수록,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사랑은 더 아름다워요.
자신의 빈 곳을 깊이 볼수록, 그분이 채워 주시는 은혜를 더 귀히 여기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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