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에 뭘 먹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이제 거기 들어 있던 비타민을 적어 보세요. 닭고기의 아미노산 구성을 말해 보세요. 그 온도에서 기름이 밥알에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해 보세요.

못 하죠. 그런데 그게 한 번도 먹는 걸 막은 적은 없어요. 그냥 앉아서, 맛있게 먹었고, 몸은 우리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알아서 그 화학 작용을 다 해냈어요.

그런데 성경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이 멀쩡한 상식을 내려놔요.

갑자기 모든 성분이 밝혀지기 전에는 식사를 시작할 수 없게 돼요.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뭔가. 1세기에 이 단어는 무슨 뜻이었나. 이 장은 왜 여기에 놓였나. 그러다 답을 못 하면 책을 덮고,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분류해 버려요.

이해는 소화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 그 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다윗은 실제로 작동하는 순서 그대로 말했어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개역한글)

먼저 맛보고, 그다음에 알아요. 공부한 다음에 맛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더 단순한 그림으로 같은 말을 해요.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2 (개역한글)

여기서 그 젖을 가리켜 쓴 말이 (아돌론) ἄδολον — "섞인 것이 없는, 속임 없는, 순수한"이에요. 개역한글은 이 말을 "순전하고"로 옮겼어요. 더한 것도 없고 뺀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베드로가 세운 독자의 본보기를 보세요. 갓난아이예요. 갓난아이에게는 신학도 없고, 참고 도구도 없고, 성경 읽기표도 없어요. 있는 건 식욕 하나인데, 그것으로 자라요.

이 말이 공부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원어 연구는 좋아요. 주석도 유익해요. 파고들고 싶으면 파고드세요.

다만 분석을 식사의 입장료로 만들지는 마세요. 밥상을 다 이해하기 전엔 숟가락을 들지 않겠다는 사람은, 음식이 가득한 부엌에서 굶어요.

그러니 내일은 진짜 배고플 때 냉장고를 여는 그 마음으로 성경을 펴세요. 좋은 걸 찾아보세요. 집으세요. 맛있게 드세요.

양분은 당신의 설명을 기다려 주지 않아요.

당신은 평생, 설명하지도 못하는 음식으로 배불리 살아왔어요. 성경도 똑같이 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