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는 생명의 다른 이름

아이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한번 보세요. 다리는 계속 흔들리고, 손은 가만있질 않아요. 부모가 "가만히 좀 앉아 있어" 해도 그 말을 오래 지키지 못해요.
버릇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심심해서도 아니에요. 생명이 넘쳐서 그래요. 아이의 몸에는 아이 자신도 어쩔 줄 모를 만큼 많은 생명이 담겨 있어요.
우울이나 쓴 마음의 계절을 지나는 어른은 달라요. 움직임이 사라졌어요. 가벼움도 사라졌어요. 분명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무언가가 빠져나가 버렸어요.
성경은 그 상태에 이름을 붙여요. 감정이 부정적으로 기울 때, 우리가 쓴 마음을 품고 비관하고 절망할 때, 사망이 감정의 영역까지 들어온 거예요. 죄가 인류에게 사망을 들여왔고, 사망은 한 칸에만 얌전히 머물지 않아요. 우리가 느끼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번져 가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품는 생각 하나를 바로잡아야 해요. 우리는 치유를 따로 떨어진 물건처럼, 구하면 하나님이 꺼내 주시는 물품처럼 여기곤 해요. 그런데 성경이 보여 주는 건 훨씬 단순해요.
치유는 생명이 드러난 것이에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만나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세요.
문둥병은 몸 안에서 일하는 사망의 한 형태예요. 살은 감각을 잃고, 조직은 썩어 가요.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사망이 떠난 건, 생명이 도착했기 때문이에요. 그 치유는 그 사람의 병 위에 덧입힌 기술이 아니었어요. 예수님 안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 사망이 자리 잡고 있던 곳에 닿은 거예요.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실 때 쓰신 '생명'은 (조에) ζωή — "생명",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바로 그 생명이에요. 개역한글은 이 단어를 '생명'으로 옮겼어요.
예수님은 "더 풍성히"라고 하셨어요. 이 생명에는 분량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그 생명이 당신의 영에서 멈추기를 원하지 않으세요. 그분의 설계는 그 생명이 먼저 영을 채우고, 이어서 혼(생각과 감정)에 스며들고, 마침내 몸에까지 닿는 거예요. 생명이 몸에 닿은 상태를 우리는 건강이라고 불러요. 생명이 당신의 모든 부분을 채운 상태를 성경은 온전함이라고 불러요.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 결과에 곧바로 이어 두세요.
그리고 이 생명은 피부에서 멈추지 않아요. 관계에서도 드러나요. 생명이 가득한 사람은 더 사랑하고 더 다정해져요. 서운한 일도 금방 용서하게 되는데, 이를 악물고 참아 내서가 아니라, 가득 찬 사람에게는 빚을 놓아줄 여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비어 있는 사람은 앙금을 붙들어요. 쓴 마음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생명이 모자라다는 증상이에요.
그래서 의자에 앉은 아이 이야기가 중요해요. 아이들은 넘치는 생명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줘요.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지요. 사실은 죄가 우리를 너무 일찍 늙게 만들었고, 우리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생명을 품는 능력을 잃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답은 자기 개선이 아니에요. 그분의 답은 그분의 조에 생명을 더 주시는 것, 당신의 영에, 감정에, 몸에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 치유를 목록의 한 항목으로, 기쁨을 또 다른 항목으로, 더 나은 관계를 세 번째 항목으로 삼아 쫓아다니지 마세요. 그것들은 하나예요. 생명이 도착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에요.
치유를 물건처럼 구하지 말고, 그분의 생명을 더 구하세요. 치유란 그저 생명이 눈에 보이게 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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