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등 뒤에 있어요

길 위에 서 있다고 해 봐요. 사람은 한 번에 한 방향만 바라볼 수 있어요. 무덤을 마주 보든지, 구주를 마주 보든지 둘 중 하나예요. 둘 다 볼 수는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은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아요. 저 앞 길 위에 박혀 있는 고정된 지점처럼 여기죠.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건강검진 결과지는 이정표처럼 읽혀요. 그래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계획하고, 그것을 대비해 저축하고, 그것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성경은 신자를 그 길 위의 다른 자리에 세워 놓아요. 사망은 당신 앞이 아니라 등 뒤에 있어요.
왜 그런지 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일부만을 위해 죽으신 게 아니에요. 당신의 영과 혼과 몸을 다 사셨어요. 그리고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그 부활은 그분의 죽으심이 당신을 위한 것이었던 그대로 당신을 위한 것이었어요. 그분이 사망과 맞부딪히셨어요. 그리고 이기셨어요. 그 대결은 이미 끝났고, 과거에 놓여 있어요 — 예루살렘 성 밖 언덕 위, 역사의 어느 하루에요.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옮겼느니라"로 번역된 말은 (메타베베켄) μεταβέβηκεν — "건너가 버렸다"예요. 헬라어 완료 시제 동사인데, 이미 끝난 행동인데 그 결과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켜요. 당신은 믿는 그 순간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갔고, 지금도 그 건너편, 생명 쪽에 서 있어요. 건너는 일은 이미 등 뒤로 지나간 일이에요.
심판도 등 뒤에 있어요.
이 구절의 순서를 눈여겨보세요. 죄를 담당하시는 일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끝났어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것은 법정이 아니에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것은 한 분이시고, 그분은 "죄와 상관 없이"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나타나세요.
구속에는 두 부분이 있어요. 피로 값 치른 구속은 끝났고, 능력으로 이루실 구속은 예정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영과 혼과 몸의 값을 자기 피로 치르셨어요. 그 지불은 완료됐어요. 다만 사신 것 중 한 부분 — 몸 — 은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이 능력으로 이루실 구속이에요. 이미 사 두신 것을 찾아가시는 날이죠.
그래서 신약성경은 신자에게 무덤 맞을 준비를 하라고 말하지 않아요. 구주를 기다리라고 말해요.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실 때, 자기 백성에게 몸으로 하라고 주신 지시가 있어요.
여기서 "구속"으로 옮겨진 말은 (아폴뤼트로시스) ἀπολύτρωσις — "몸값이 치러져 얻어낸 놓여남"이에요. 몸값은 십자가에서 이미 치러졌어요. 몸의 놓여남은 그분이 나타나실 때 이루어져요. 그러니 예수님은 고개를 어디로 향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아래가 아니라 위로예요. 뒤가 아니라 앞으로예요.
이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화요일을 사는 방식까지 바꿔 놓아요. 무덤을 마주 본 사람은 날짜를 세어 내려가요. 구주를 마주 본 사람은 세어 올라가요 — 그분 나타나실 날에 하루 더 가까워졌다고요. 장례식장에서 진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면서도, 신자에게 관이 종착역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견디기 힘든 진단서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내 인생의 마지막 장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수 있어요. 신자에게 이야기의 끝은 흙 한 삽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리는 호령이에요.
사망은 옛 길에 속한 것이에요. 당신은 십자가에서 길을 갈아탔어요.
당신은 무덤을 향해 행진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주를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죽음은 이미 등 뒤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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