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질문—“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2 (개역한글)
—은 사실 질문이 아니에요. 일깨움이에요. 이 말에 답하려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으셨는지를 알아야 해요.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죄의 지배 아래 계신 적이 없어요. 정말 한 번도요. 그분이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는 건, 죄의 죄책과 죄의 정죄와 죄의 전가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뜻이에요 (이사야 53:6).
그렇다면 당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도 죄의 존재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죄가 당신에게 걸어 오는 권리 주장에 대한 죽음이에요.

당신이 죽은 자리는 법정이지, 싸움터가 아니에요.

여기라 — 당신을 자유케 하는 회계 용어

바울은 이렇게 말해요.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로마서 6:11 (개역한글)

여기 “여기다”는 (로기조마이) λογίζομαι — “셈에 넣다, 계산하여 장부에 올리다”라는 회계 용어예요. 개역한글은 이 단어를 “여길찌어다”로 옮겼어요. 그저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에요. 아닌 걸 그런 척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미 결산이 끝나 확정된 사실로 계산에 넣으라는 뜻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죄책에는 이미 “완납” 도장이 찍혔어요.

그리고 여기에 영적인 물리 법칙이 있어요.
죄의 은 죄의 죄책에서 풀려난 다음에야 이길 수 있어요.
양심이 아직 정죄와 흥정하고 있는 한, 죄는 언제나 당신보다 세 보일 거예요.

예수님이 보여 주신 순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행실에 대한 훈계로 말문을 여시지 않았어요.
판결로 시작하셨어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한복음 8:11 (개역한글)

그러고 나서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은혜가 죄책을 걷어내고,
죄책이 걷히면 죄는 끌어당기는 힘을 잃어요.

정죄를 다시 마음에 들이는 순간, 당신은 “여기는” 일을 멈추게 돼요.
여기기를 멈추면, 죄는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해요.

하지만 당신이 진리 위에 설 때—
죄책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는 진리,
재판장이 이미 판결을 내리셨다는 진리,
당신의 장부가 깨끗하다는 진리 위에 설 때—
죄의 힘은 무너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