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처럼 느껴져도, 진짜가 아니에요

거친 물살을 두 시간 건너고 나서 배에서 내려요. 발이 콘크리트 바닥에 닿아요. 부두는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몸은 아니라고 해요. 그 뒤로 한 시간쯤, 땅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내려가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데, 그래도 그렇게 느껴져요.
혹은 축일을 알리느라 교회 종이 오 분 동안 울려요. 종 치던 사람이 줄을 놓아요. 종은 가만히 멈춰 있어요. 그런데 귀에는 아직 들려요. 소리는 공기 중에서 멎었어요. 머릿속에서는 아직 멎지 않았어요.
두 가지 사실이 나란히 놓여 있어요. 내 경험에는 그 흔들림이 진짜예요. 실제로는 진짜가 아니에요.
육신이 딱 그래요.
하나님은 육신이 죽은 것처럼 느껴질 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때에 죽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명령을 주세요.
이 명령의 모양새가 뭔가를 알려 줘요. 육신이 내 경험 속에서도 죽어 있다면, 하나님이 굳이 죽은 자로 여기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요. 시체를 앞에 두고 시체로 여기라고 일러 주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이 이 명령을 주시는 건, 내 경험과 하나님의 실제가 아직 어긋나 있기 때문이고, 그 어긋남 앞에서 하나님 편에 서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여길지어다"로 옮겨진 말은 (로기제스테) λογίζεσθε — "세다, 계산하다, 장부에 기록하다"예요. 회계 장부의 언어예요. 장부를 적는 사람이 잔액을 만들어 내지는 않아요. 이미 사실인 것을 기록할 뿐이에요.
그러면 이 어긋남은 어디에 있을까요. 영(靈)에 있지 않아요. 내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 이미 일어났어요. 어긋남은 혼에 있어요. 생각과 기억과 감정에요. 부두가 여전히 흔들리는 자리가 거기예요. 종소리가 여전히 울리는 자리가 거기예요. 그래서 바울은 그 일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정확히 짚어 줘요.
한 가지 더요. 육신을 죽은 자로 여긴 바로 그 직후에 느낌이 더 커지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그건 이미 싸움에서 진 자가 지지 않은 척하려고 내는 마지막 숨소리예요.
육신이 부를 때, 느낌과 논쟁하지 마세요. 느낌은 논리에 대답하지 않아요. 그 느낌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여 주세요. 지나간 흔들림을 아직 보고하는 몸이고, 멎은 소리를 되감아 트는 머리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말하세요. 죽었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서.
발은 부두를 딛고 있어요. 흔들리는 느낌이 아니라 부두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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