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열매, 하나님의 열매

무화과나무를 두고 무슨 나무냐고 다투는 사람은 없어요. 가지를 보고, 거기 달린 것을 보면, 어떤 나무인지 알게 되니까요.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똑같은 시험지를 내밀어요. 율법에 대해 무엇을 믿느냐고 묻지 않아요. 당신의 삶이 무엇을 맺어 내느냐고 물어요.
정욕은 이미 육신 안에 있었어요. 율법이 그것을 만들어 낸 게 아니에요. 율법은 그것을 깨웠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 결과는 열매였어요. 진짜 열매였어요. 다만 사망을 위한 열매였어요.
갓 칠한 공원 벤치에 붙은 팻말을 떠올려 보세요. "페인트 주의. 만지지 마시오." 그 말은 틀리지 않았어요. 정말로 페인트가 덜 말랐으니까요. 그런데 그 글씨를 읽는 순간, 손가락이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져요. 팻말이 그 마음을 심은 게 아니에요. 이미 있던 마음을 드러내고 건드린 거예요.
계명이 육신에게 하는 일이 바로 그거예요. 바울이 쓴 열매라는 말은 (카르포스) καρπός — "열매, 소출"이에요. 개역한글은 이 단어를 로마서에서 "열매"로, 요한복음에서는 "과실"로 옮겼어요. 율법도 분명히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맺어 내요. 다만 생명은 맺어 내지 못할 뿐이에요.
그러고 나서 바울은 장을 넘기듯 방향을 바꿔요.
순서가 중요해요. 먼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고, 다음으로 살아나신 분과 하나가 되고, 그다음에 열매예요.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으려면 더 힘을 내라고 말하지 않아요. 당신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말해 주고, 열매는 그 연합에서 따라 나와요.
열매를 정하는 것은 노력이 아니라 연합이에요.
예수님도 십자가 전날 밤에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가지는 포도알을 맺으려고 용을 쓰지 않아요. 그저 붙어 있을 뿐이고, 일은 나무의 진액이 해요.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당신의 신앙이 무엇을 맺고 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규칙을 지키려는 애씀이 오히려 더 깊은 실패와 더 짙은 부끄러움을, 그토록 싸워 왔던 바로 그것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있지는 않나요? 그게 바울이 5절에서 말한 열매예요. 율법이 육신 위에서 일할 때 나오는 열매예요.
이제 반대편을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쉬고, 그분 안에 있는 당신의 자리를 이미 결정된 일로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요. 사랑이 나타나요. 오래 참음이 나타나요. 억지로 짜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자라요.
어느 쪽을 갖고 싶으세요? 바울은 두 가지를 다 당신 앞에 놓아요. 율법 아래서는 사망을 위한 열매, 살아나신 그리스도 아래서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예요.
당신이 고르는 것은 열매가 아니에요. 누구와 하나 될지를 고르면, 열매는 따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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